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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의 둥지마련을 위한 🌈활동가 이야기, 소리 편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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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은 둥지가 필요해😊
커뮤니티알 12주년 공간마련 프로젝트를 위한
🌈활동가 이야기, 소리 편

<소중한 마음과 글이 여러사람들에게 닿기를>

HIV 감염 소식을 알게된 것은 2011년 여름 군휴학을 내고 학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할 때였다. 따로 HIV 감염으로 인한 증상은 없었으나 그 해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장염으로 입원을 했던것의 원인이 HIV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물론 장염으로 알게된 것은 아니었고 다른 질환으로 치료를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동의없이 HIV 검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로 HIV 감염 사실을 알게되었다. 

여름이었다. 그것도 매우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HIV라는 단어를 처음 병원에서 들었을때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되물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에이즈를 아냐’고 되묻는 의사의 말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주변의 말이 모두 음소거 된듯 내게 들리지 않았다. 만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죽을 병에 걸린 것을 알게되는, 흔한 클리셰에서나 연출하는 그런 장면이 나에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물론 HIV에 감염이 된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 당시 나에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성교육 시간에 에이즈에 관해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를 보여준 기억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를 들은 뒤 병원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택시기사의 ‘날씨가 참 좋죠?’라는 질문에 ‘네 X같이 너무 좋네요’라고 대답을 하는 순간 그 말이 신호탄이 된 듯 부정적인 감정이 밀려왔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지?’ 병원에서 나오고 처음 든 생각이었다.

확진을 받고 매일 HIV에 대해 검색해보며 ‘에이즈는 없다’라는 거짓 정보에 혹해 ‘사실 난 HIV에 걸리지 않은 것이 아닐까?’라며 헛된 희망도 품어보고, ‘에이즈=죽는 병’이라는 글과 혐오가 섞인 정보를 접하며 자기혐오에 빠져들고 있었다. 오지 않는 잠을 자기 위해 한 밤중에 나와 편의점에서 소주 2병씩 사서 병나발로 마시고 토하고 집에 들어가서 억지로 잠을 청하는 생활을 지속했다. 1주일 정도 그런 생활을 하니 속은 속대로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정신은 피폐해져갔다. 이렇게 생활하다가는 좋지 않은 선택을 할 것 같아 술에 취한 상태로 그때 당시 친했던 형에게 전화를 걸어 HIV 감염사실을 고백했다. ‘너무 힘들다’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나의 말에 ‘너무 힘들었을텐데 나에게 말해줘서 고맙다’며 ‘HIV는 약만 먹으면 잘 살 수 있는 병이니까 같이 이겨내보자’는 말을 해줬다. 나에겐 그 한마디가 나를 살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같았다. 내가 살 수 있다는 그 한마디가 진짜로 나를 살렸다.

그렇게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일상생활로 차츰 돌아갈 용기를 얻은 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그 형과 함께 밥도 먹고 사람도 만나면서 ‘어떻게든 살아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집에서 잠에 들때면 찾아오는 자기혐오와 세상의 에이즈에 대한 혐오에 몸이 떨려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여전히 HIV를 가진 사람은 주변에 나밖에 없는 것 같았고, 내가 나서서 같은 HIV 감염인을 찾는 것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검색을 통해 HIV 감염인이 모여있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가입하고나서도 혹시나 하는 아우팅의 우려 때문에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는 것을 주저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낸 것은 역시나 그 형이었다.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말에 용기를 낼 수 있었고 그렇게 나간 모임에서 원래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각자 서로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에 놀라 ‘왜 이자리에 있냐’며 같은 질문을 서로에게 던졌다.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나와 같은 HIV 감염인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어색해하는 나에게 친구는 또래들만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새로 생길 예정이니 나중에 가입하라고 귀띔을 해줬다. 그렇게 커뮤니티알을 만나게 되었다.

커뮤니티알은 10~20대의 HIV 감염인이 가입이 가능한 커뮤니티였다. 그렇게 가입한 커뮤니티알의 첫 오프라인 모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 한 대학 학생회실을 빌려 서로 어색한 눈빛을 보냈던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비슷한 연령대의 HIV 감염인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며,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첫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나이를 가진 이유 때문이었을까 서로 조금더 친해지기 위해 간 뒷풀이 장소에서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지금과 다른점이라고 하면 그 당시에는 오프라인 모임을 종로를 피해서 진행했던 점이랄까? 서로 HIV의 H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리고 약을 먹기 위해 알약을 가방에서 꺼내면 화를 내는 분위기였다. 물론 지금도 HIV 감염인이라는 것을 큰 소리로 떠들며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서로의 감염사실을 노출시킬 수 있는 어떠한 요소라도 가리고 숨겼다. 심지어 뒷풀이도 매번 사방이 막힌 단체실같은 장소만 골라서 했으니까.

그렇게 매우 조심스럽고 스스로를 감추어야했던 나와 커뮤니티알의 변화는 커뮤니티알이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면서였던 것 같다. 커뮤니티알이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같이 부스 기획을 할 TF팀을 구한다는 소식에 용기를 내어 참여했다. 그동안 커뮤니티알의 진행했던 각종 프로그램과 인권캠프를 통해 나의 존재가 무서운 질병덩어리가 아닌 인권을 보장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일까? 퀴어 커뮤니티에서 가볍게 던지던 ‘잔돌려먹으면 에이즈 걸린다’, ‘에이즈년’ 같은 혐오가 섞인 농담에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가 여기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가리고있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나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었지만, 그보다 나도 퀴어 커뮤니티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걱정 반 설렘 반인 기분을 안고 참여한 퀴어문화축제는 의외로 별것 아니었다. 내가 커뮤니티알 부스에 있다는 이유로 병걸렸다며 수근거리거나 손가락질하는 퀴어들은 없었다. 오히려 부스에 와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힘내라며 응원해주고 가는 사람들을 만나 한쪽에 응어리져있던 자기혐오가 녹아내렸다. 물론 반대편에서 에이즈 혐오가 담긴 메시지를 외치며, 퍼레이드 트럭 앞에서 대자로 누워 행진을 방해하는 혐오조장세력들이 있었지만, 나에겐 그보다 우리의 존재를, 나를 드러냈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더 컸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바로 그때부터였다. 물론 인권활동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보단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감투에 대한 욕망이 더 컸다. 운영지기들이 HIV 감염인들을 위해 사업을 기획하고 커뮤니티알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너무 멋져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지기가되고 싶다는 내 말에 그 당시 함께하던 지기들은 부정적인 답변을 했었다. 그냥 멋져보인다는 이유만으로, ‘HIV 감염인들을 위해 어떤 것을 하고싶다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당시 인권감수성이 매우 결여되어있던 나의 언행도 한 몫 했다. 스스로를 돌아봤다. 정말 내가 운영지기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내가 운영지기로서 어떤 것을 얻고 싶은지 등 고민하고, 결정내린 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전했다.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동안 커뮤니티알의 프로그램에서 느꼈던 감정과 퀴어문화축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세상에 던지고 싶은지를 이야기했고, 지기 중 한 명이 개인사정으로 그만두는 시기와 맞물려 운영지기 회의를 통해 2016년에 운영지기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운영지기가 되고나서 초반은 회의 내용을 따라가기에 너무 어려웠다. 요양병원이 어쩌고 건강권이 어쩌고 에이즈예방법이 어쩌고 인권위가 어쩌고 하는 내용은 그동안 인권에 무지했던 나에겐 너무나 먼 내용이어서 중간중간 모르는 내용을 계속 질문했다. 그리고 커뮤니티알이 연대단체로 함께하고 있는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에이즈환자 건강권보장과 국립 요양병원마련 대책위원회 등 나갈 수 있는 연대체 회의에 닥치는 대로 나가며 HIV/AIDS 관련 현안을 알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기쁨과 동시에 HIV 감염인, 에이즈 환자가 겪고 있는 각종 인권침해를 알게 되면서 분노와 슬픔도 느꼈다. 특히 2016년에 진행했던 UNAIDS 낙인지표조사에서는 우리나라 HIV 감염인의 내적낙인이 다른 국가와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HIV 감염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현실적인 장벽들이 매우 다양한 방면에 있으며, 성적권리, 건강권, 노동권 등 다양한 권리에서 HIV 감염인에게 제도와 정책이 어떻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허술한 지점이 존재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연대체 회의와 커뮤니티알 운영지기 활동을 통해 열심히 배우려 노력한 부분도 있지만 이 과정을 함께해준 여러 활동가들과 특히 다른 운영지기들이 여러 방면에서 조언과 지지를 해주었기에 가능했다. 

그와 동시에 운영지기에 합류한 이후 다른 운영지기들과 함께 지속해왔던 고민은 ‘언제까지 상근활동가가 없이 인권활동에 집중할 수 있을까?’였다. 커뮤니티알은 2011년 12월 1일 발족 이후 상근활동가가 없는 상태로 각자 생업과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긴급 대응이 필요한 의제나 상담이 들어올 경우 발빠르게 행동을 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후 5년, 10년을 바라보고 꾸준하게 커뮤니티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권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본격적으로 2017년부터 논의를 통해 운영지기인 소주를 1인 상근으로 둔 비영리단체로 도약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고, 2018년 4월 28일 커뮤니티알의 첫 번째 도약 ‘R, Love You’를 통해 CMS개설과 동시에 비영리임의단체 등록을 진행하여 드디어 상근활동가를 둔 인권단체로 거듭날 수 있었다.

도약을 통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1인 상근활동가를 두었고, 상담채널을 개설하였으며, 그동안 놓칠 수 있던 긴급한 의제나 연대체 활동 등 인권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다만, 상근활동가의 활동비가 터무니없이 적은 60만원 뿐이었고, 사무실이 없어 개인의 집과 카페를 오가며 업무를 진행해야 했으며 회의는 카페에서 진행했다. 그래도 다른 운영지기들과 함께 열심히 커뮤니티알의 사업확장과 발전을 위하여 꾸준한 활동을 진행했기 때문일까? 커뮤니티알이라는 단체를 알릴 기회가 많아진 덕분인지 정기후원이 조금씩 늘었고, 여전히 적은 금액이지만 상근활동가의 상근비를 조금씩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커뮤니티알의 발전과 반대로 내 생활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다니고 있던 회사의 업무를 평일 저녁과 주말을 가지리 않고 처리해야할 때가 늘었으며, 생업과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매우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적인 특성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수직적인 명령하달의 방식과 하이리스크 로우리턴, 이성애 중심적인 기업문화 등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게 뭐? 다 그런거 아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들이 나에겐 너무나 큰 스트레스 요소로 다가왔다. 결국 2020년에는 운영지기를 잠시 내려놓고 생업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운영지기를 떠나 생업에 집중하는 시간이 나에겐 매우 끔찍했던 시간이었다. 1년 반 동안 2번의 이직을 했는데 커리어를 위해 이직했던 곳에서는 직속 상사가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을 통해 자존감을 깎아내렸으며, 한 곳은 전직원이 특정 종교를 믿는 종교인들로 구성되어있었다. 물론 가스라이팅은 안당하면 되는거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종교인들이 가득하다고 해서 나에게 종교를 강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를 끔찍한 부하직원쯤으로 여기며 반 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행하는 가스라이팅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자존감을 떨어뜨리기엔 충분했다. 조금이나마 자존감을 회복하고자 이직한 곳에서는 퇴근시간에 찬송가를 틀고 점심시간에는 종교이야기를 하는 회사였다. 그렇다고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곳도 아니었다.

1년 반 가까이 자존감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커리어는 안 쌓이고 스트레스만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나니 ‘내가 왜 자신을 갉아 먹으며 살아야할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2021년 말 일을 그만두고 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에게 정말 의미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커뮤니티알이었다. HIV 감염인이자 게이섹슈얼의 정체성을 가진 나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조금 뒤쳐지거나 부족하더라도 같이 응원하는 동료가 있으며, 불편함을 불편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그리웠다. 조심스럽게 커뮤니티알에 운영지기로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다른 운영지기들은 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운영지기로 복귀해서 처음 한 것은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HIV 관련 현안들이었다.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활동을 쉬면서 잊어버렸던 정보들이나 놓친 부분들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연대체 회의에 참여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활동에 복귀하고 합류한 활동 중 하나가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노동권팀과 노동권팀에서 진행하기로 결정한 노동권가이드라인팀이었다. HIV 감염인의 노동권과 관련된 제도와 법의 변화를 살펴보고 가이드라인을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HIV 감염인에게 공유하는 사업이었다. 그와 동시에 커뮤니티알에서는 2016년에 발간했던 ‘Youth HIV감염인을 위한 F&A’ 책차를 업데이트하여 많은 HIV 감염인들이 볼 수 있도록 웹사이트로 제작하자는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두 가지의 사업이 별도로 기획되었으나 최종적으로 HIV 감염인들에게 정보를 전달하자는 목적은 동일했다. 이를 토대로 현재 운영하고 있는 <HIV/AIDS정보사이트: 아카히브>의 전신이 되는 사업기획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때마침 다음세대재단의 인권운동 및 활동 지원사업을 통해 기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고 기금에 포함된 인건비 지원을 통해 비상근 활동가가 아닌 커뮤니티알의 2번째 상근활동가로서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1인 활동가이던 소주활동가의 업무를 2인 체제에 맞도록 재분배하는 작업을 거쳤다. 그러나 여전히 서로 수평적인 관계. 서로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서로 보완하며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커뮤니티를 운영을 하는 것에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다만, 2인 체제가 되며 상담을 통해 지원이 필요한 내담자가 있을 때, 그리고 사업을 진행하며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가 간의 긴급하고 긴밀한 소통이 필요할 때 전화나 메신저로 소통하거나 별도의 장소를 대관해야만 했다. 활동을 하면서 필요한 커뮤니티알의 비품을 타 단체 공간의 한구석을 빌리거나 각자 집에 보관해야했다. 우편 발송을 하거나 업무용 우편을 받기 위해 개인의 집주소를 공개해야 하고 개별 공간에 비치된 유선전화가 없어 1명의 상근활동가가 휴대폰을 상시 소지하며 상담업무를 진행해야했다.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졌다. 차별대응을 위해 내담자와 오프라인에서 긴밀한 소통을 진행하려고 해도 카페나 타 단체의 회의실을 빌려야하는 상황이 나에게도 내담자에게도 무척 부담스러운 일로 다가왔다.

안정적인, 안전한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나와 같이 HIV로 힘든 일을 겪었을 감염인 동료들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어려움을 겪는 HIV 감염인들을 편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마주하기 위해,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 이제는 커뮤니티알에는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커뮤니티알이란 10년도 넘는 시간 동안 내가 HIV에 대한 차별과 혐오, 내적낙인을 마주할 때마다 날 감싸준 소중한 울타리이다. 나의 이 소중한 마음과 글이 여러사람들에게 닿아 알의 둥지가 마련될 수 있길 희망한다.

커뮤니티알 12주년 공간마련 프로젝트
‘알은 둥지가 필요해’

8월 24일부터 12월 1일 세계에이즈의날까지 총 100일동안 소셜펀치를 통해 3500만원을 모금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많은 관심과 공유,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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