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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집 공익제보자 - 야츠마 츠카사님 이야기

2022/04/12

나눔의 집 문제에 대해 모르는 척, 보지 못한 척 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실제로 여기 할머니들이 계시잖아요. 저는 할머니들을 좋아하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눔의 집은 사회복지시설로서 할머니들의 쉼터로서 들어온 후원금을 제대로 사용해서 할머니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했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죠. 지금 살고 계시는 할머니들에게도 그렇지만 그런 서비스를 누리지 못하고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남은 시간 동안 할머니들이 최대한 행복하게 생활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 했던 거잖아요. 우리가 그런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으면서 공익 제보를 시작했는데 계속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할머니들한테 미안해요. 

 

공익 제보는 쉽게 말하면 공익이라는 게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하면 사회 정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봐요. 저는 나눔의 집이라는 공간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이곳에 할머니들이 계시니까 더 많이 사람들이 찾아오는 거지만 할머니들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공공적인 공간으로 계속 있어야 하는 거죠. 여러 사람들이 와서 위안부 문제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여기죠. 나눔의 집이 피해 생존자의 관점으로 여성 인권, 탈식민지 등 여러 과제가 많은 역사를 제대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배움의 기회를 주는 공간으로 계속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우리가 공익 제보를 하기 전까지, 나눔의 집 운영진이 바뀌고 지금까지 나눔의 집을 생각해보면 그거 못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나눔의 집은 피해자 중심이기 보다 역사를 이용해서 조계종의 홍보 기관이 되어 버렸어요. 그렇게 하면 공공성이 떨어져요. 자기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위안부 역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문제가 없는 게 아니에요. 이런 모습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다음 세대가 계속 제대로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준비해 놔야 하고, 나눔의 집이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나눔의집 공익제보자 - 전순남님 이야기

2022/04/12

시설 나눔의집은 원장이나 사무국장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 곳이었어요. 그 곳에서 개인의 의견은 묵살됐어요. 회계직원이었지만 후원금이나 정부 보조금이 얼마가 들어오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냥 할머니 환경이 열악하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일했던 것 같아요. 

 

이 곳은 희한한 점이 입사를 하면 소속이 시설인지, 법인인지 알려주질 않았어요. 국제 업무를 하던 사람이 회계가 되어 있기도 했어요. 저처럼 다른 선생님들도 할머니하고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급여에는 얽매이지 않았던 거죠. 그런데 시설은 그걸 이용했던 거예요.

 

입사했을 때는 할머니를 아침에 뵙고 점심 때 식사하시면 옆에 앉아서 수다 떨고 반찬도 놔드렸어요. 할머니 앉아계신 침대 끝에 누워 잠도 자요. 가려고 하면 할머니가 가지 마라, 놀다가라고 하시고 화투도 치자 했어요. 김대월 선생님이 사무실에서 밥을 해주기도 하고, 할머니가 김치 먹고 싶다하시면 겉절이 해서 그 자리에서 먹기도 했죠. 그때는 재밌었어요. 

 

어느 날은 할머니가 ‘데모가자, 데모가세’ 그러셨어요. 1종 스틱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저 밖에 없던 날인데, 얼마나 무섭던지. 가는 길이 너무 복잡하고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막 뛰어나오는데 슬슬슬슬 길을 뚫고 가야되잖아요. 할머니 화장실도 고려해야 되고 경로를 다 따져봐야 되고 식사도 다 챙겨야 되는데 실수할까봐 걱정했지만 다녀와서는 정말 좋아서 또 갔어요. 

 

공익제보 후 법인은 제가 사회복지쪽 경력이 없다며 회계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회계직원도 따로 뽑고 도장, 직인, 카드, 통장 다 내놓으라고 공문을 보냈어요.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회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걸 법인도 안 거예요. 회계업무를 넘기면 우리 공익제보는 끝나기 때문에 넘길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반납 안하면 고소 고발한다는 내용증명이 집으로 두 번이나 날아왔죠. 

 

당시 고1이었던 아이가 그 내용증명을 먼저 열어봤더라고요. 공익제보 하는 동안 큰 아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야근도 많이 하고 자료 준비한다고 새벽까지 출근하기도 했거든요. 사회생활하면서 싸움 한번 안 해봐서 할 줄을 모르니까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데 애한테는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되잖아요. 내용증명이 오고 경찰서 가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그걸로 받은 스트레스를 가족들에게 풀까봐 그걸 제일 걱정했어요. 그렇게 안하려고 노력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러는 것 같아서요. 가족들이 공익제보에 대해 알고도 티내지 않았고, 묻지 않았어요. 남편은 “너 돈 훔쳤냐? 아님 됐지!” 그러고 말아요. 

 

사람들은 우리가 공익제보 후 이직 문제를 제일 걱정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어딜 가든 여기서 받는 돈 정도도 못 벌겠어요? 중간에 이직할 기회도 몇 번 있었지만, 제가 나가면 후원금으로 법인의 벌금을 내야할 수도 있고 공익제보가 한계에 묶여버리잖아요. 모두들 저에게 나가는 게 맞다고 해도 혼자 편하자고 나가면 발 뻗고 못 잘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눔의 집에 있는 게 몸이 불편해도 정신은 편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잘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컸어요. 잘 될 거라는 긍정의 메시지,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러다 우리가 빛을 볼 수도 있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기다려보자, 이러다 좋아질 것 같지 않냐?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만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걱정 없이 할머니들 만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나눔의집 공익제보자 - 조성현님 이야기

2022/04/04

 

원래는 군인 부사관이었습니다. 7년 정도 지났을까요? 새로운 길을 찾고 싶어 인근 대학 사회복지학과 야간 과정의 문을 두드렸지요. 사회복지 현장실습을 통해 처음으로 나눔의 집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를 추천한 학교 교수가 다름 아닌 안신권 나눔의 집 전 시설장이었기 때문이에요. 실습기간 동안 할머니들과 정이 들었던 터라 실습이 끝나고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봉사활동을 몇 달 동안 하기도 했지요.

 

마침 직원 채용이 진행되어 운 좋게도 2018년 10월에 이 곳에 입사를 하게 됩니다. 시설의 비리를 깨달은 건 고작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억 원의 기부금이 들어오는데도 정작 할머니들이 입는 옷은 하나같이 다 낡은 것들이었어요.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라 해봤자 종교활동 외에는 없고 할머니들의 자유로운 외출도 금지했지요. 기본적으로 필요한 식료품, 간식, 생활용품은 후원금과는 완전히 별개였어요. 치약이 없어 예산으로 구매를 했다가 혼이 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저 후원되는 물품을 받아쓸 따름이었어요.

 

안신권 시설장과는 학교 때부터 쌓은 연 같은 게 있었지만, 할머니들의 현실을 알고부터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할머니들에게 해도 해도 너무 했으니까요. 제가 배우고 생각한 사회복지의 상식을 완전히 배반하는 곳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함께 근무하는 그 누구라도 실상을 모를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우리는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가로막혔고, 또 건의하고 다시 좌절하고의 무한 반복이어었어요.

 

그러다 그 유명한 PD수첩이 방영됩니다. 방송 시각에 공익제보 직원들이 한데 모여 펑펑 울면서 봤습니다. 그 눈물은 그동안 힘들었던 기억을 딛고 이제는 다 끝났다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으니 국민들이 다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와 확신으로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나눔의 집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머니들을 대하는 마음과 우리의 삶만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공익제보에 나선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괜히 이 난리를 쳐서 할머니들이 그나마 누렸던 것들조차 더 어려워진 것은 아닌지, 죄책감과 죄송한 마음 탓에 요즘은 할머니 얼굴을 뵙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공익제보자’라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직업군인 생활 이후 제2의 인생을 나눔의 집에서 시작했는데, 원치 않게 도래하게 된 제3의 인생을 과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 건지, ‘공익제보자’인 저로서는 막막하기만 합니다.   

      

나눔의집 공익제보자 - 이우경님 이야기

2022/04/04

저는 2019년에 나눔의집 역사관 학예사로 입사했습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입사하기 전부터 나눔의집에 관심이 많았어요. 출근 첫날이 기억나요. 아침 회의시간이었는데 전 소장과 조리사가 싸웠거든요. 나눔의집에 문제가 많이 있구나를 첫 출근 날부터 느꼈죠. 이후에 지켜보니 불합리한 일들이 그동안 많았더라고요. 그래서 직원들이 공익제보하기로 할 때 저도 함께 하게 됐어요.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해야 하니까요. 

역사관은 김대월 선생님, 야지마 츠카사 선생님, 저 이렇게 세 명이 일하고 있어요. 역사관에서 진행되는 전시, 심포지엄, 프로그램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인력이었어요. 재작년에는 저희 이외에도 학예사 두 분이 더 계셨어요. 박물관협회에서 인건비를 지원받아 학예사 두 분을 더 모시고 일할 수 있었거든요. 두 분과의 계약기간이 다 되어서 재계약을 하려고 했는데 하지 못했어요. 박물관협회에 인건비 지원 사업을 신청하려고 하는데 운영진들이 직인을 내주지 않았거든요. 이전에 나눔의집에 있었던 스님도 똑같이 박물관협회에서 인건비를 지원받았었는데 상근도 하지 않은 채 그 돈을 횡령하고 서류 조작한 일을 저희가 제보했었거든요. 결국 여러 문제들로 인해 인건비를 지원받지 못했고, 이후에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입사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갈등 안에서 일하고 있어요. 초기에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빨리 이직해서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 뿐만이 아니라 다들 너무 힘들지만 위태롭게 버티고 있거든요, 공익제보를 하고도 아무것도 바뀌거나 변하지 않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포기하고 나가면 다른 선생님들도 얼마나 힘이 빠지시겠어요. 다 힘들지만 그래도 서로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다들 좋은 자리가 있어도 포기하고 나눔의집에 남아 있는 건, 저희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과 잘못된 건 바로 잡아야 한다는 그 마음 때문이에요. 그러니 제가 빠지면 안 돼요. 다만 힘든 상황 속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더 이상 할 게 없어요. 그래서 너무 답답해요. 

저는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운영진들에게 공격을 덜 받는 편이에요. 다른 선생님들은 수십 건의 고소고발을 당하시는 데다 업무 배제도 당하셔서 정말 힘드시거든요. 그 곁에서 힘들어하는 직원들을 보고 있으면 제가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는 게 스스로 가장 힘들고 괴로워요. 그래도 저희 곁에서 단체 활동가님들과 변호사님이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직원들이 고소고발을 많이 당하니까 변호사님은 그때마다 자료도 꼼꼼하게 준비해주시고 애써주세요.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주시니까 저희는 고맙고 죄송하잖아요. 저희도 더 이상 고소고발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운영진이든 언론에든 나눔의집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만 하면 고소고발을 당하니까 어느 순간 위축되고 더 이상 어떤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요.

공익제보 이후에 나눔의집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악화되고 있거든요. 지금도요……. 할머니들은 할머니들대로 고립되시고, 공익제보 한 직원들은 운영진들의 고소고발과 업무배제로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요. 제가 바라는 건 한 가지예요. 나눔의집에서 벌어지는 일이 더 적극적으로 외부에 알려져서 이 문제를 시민들도 많이 알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할머니들을 앞세워 이용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고, 나눔의집이 오로지 할머니들을 위해 운영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앞으로도 이 문제가 절대로 잊혀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눔의집 공익제보자 - 허정아님 이야기

2022/03/23

2019년은 몸은 많이 힘들었지만 직원들이 모두 즐거워했어요. 왜냐면 그때는 우리가 뭔가를 하면 할머니들이 즐거워하셨고, 뭔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거든요. 그 때는 나눔의집이 이 정도까지 엉망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운영방식만 민주적으로 바꾸고 할머니들한테 잘하고 그러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시에 일은 정말로 많았거든요. 그래도 행복했어요. 

2020년에는 이 일이 본격적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죠. 그때도 몸은 힘들었지만 희망은 있었어요. 도와주시려는 분들도 많았고. 우리가 열심히 하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눔의집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어요. 나눔의집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문제를 밖으로 드러냈음에도 관리·감독의 의무가 있는 지자체나 스님들이 들은 척도 안 하는 게 화가 났지만, 이제 이 문제를 알게 된 시민들이나 단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니까 상황을 빨리 바꿀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 와중에 운영진이 바뀌었는데, 바뀐 운영진도 할머님들한테 잘못하는 걸 보면서 상황을 빨리 바꿔야 된다라는 촉박함이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2021년은 아주 끝내주는 해였던 것 같아요. 나눔의집 상황에 아무 진전도 없고, 희망도 없고. 제가 했던 일을 돌아보면, 2020년까지는 나눔의집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여러 가지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2021년에 제가 한 일의 대부분은 ‘나 죄 안 졌어요, 이거 내 잘못 아니에요, 내가 한 거 아니에요. 이거는 내가 한 일이 맞아요. 저들이 안 했다고 하는데 이거 내가 한 일이에요.’ 이런 말을 되풀이하는 거였어요. 어느 순간 제 일이 바뀌어버린 거죠.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진짜 죄지은 사람처럼 어디 가서 청문회 받고 경찰 조사 받고 이런 일만 한 거예요. 처음에는 잠시 지나가는 통과의례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게 너무 길어지고 계속 되니까 이제는 내가 공익제보를 한 게 맞는지, 내가 지금 왜 여기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니까 밖에다가는 공익제보자라고 얘기를 하는데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은 ‘난 이런 일 안 했어요.’라는 소리만 반복하고 있으니 그게 제일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2021년도가 너무너무 지겨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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